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용문산 전투 (문단 편집) == 기타 == * 경계부대인 2연대가 후퇴하는 대신 사단 주저항선 앞쪽에서 사주방어를 실시하도록 한 결정을 [[장도영]] 장군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미리 의도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사학자들의 의견이 다소 갈린다. 그러나 최전선보다 약간 후방인 427고지에 강화진지를 '''미리''' 구축해 둔 점, 부사단장 임부택 대령이 전투 직전 돌아다니면서 "대대 단위로 전면방어를 실시하라"고 교육한 점, 포위기동이 특기인 중공군을 상대로 두 번이나 성공적으로 후퇴 후 고지 점령에 성공했다는 점, 그리고 미 육군 고문관의 2연대 완전철수 권고를 무시하고 04시까지 427고지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린 점 등을 미루어보면 처음부터 철저하게 작전 계획을 수립해놓고 움직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물론 압도적인 화력지원을 받은 덕이 크기는 하지만, 그래도 '''[[군단]]급 총공세를 1개 연대로 방어'''해내고, 직후 반격에 성공하여 '''1개 사단으로 중공 63군을 와해시킨''' 장도영 장군은 전쟁사에 길이 남을 명장이 되었다. 훗날 장도영이 육군참모총장까지 오른 것도 이때의 승리로 얻은 명성이 큰 역할을 했다. * 2연대의 방어전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보여 주는 수많은 무용담들이 아직까지도 생생히 전해지고 있다. 최고 격전지였던 353고지에서 19일 밤 10시 중공군 3차 공격 때 있었던 에피소드가 대표적이다. 중공군 주공을 받은 3대대 10중대는 예하 소대장 둘이 전사 혹은 중상을 입고 방어선이 흔들리자 [[중대장]]이 당황하여 일부 병력과 엉겁결에 대대관측소로 후퇴하면서 중대가 와해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대대장한테 까이고 제정신을 차린 중대장이 다시 진지로 복귀하자 '''[[정훈병]]''' 서기종 일병이 호 밖으로 뛰쳐나와 카빈을 연사하면서 "중대장님이 건재하시다. 다시 싸우자. 이대로 물러나면 우리는 모두 죽는다." 라고 독려했다. 중대원들은 훤히 노출된 호 밖에 우뚝 서서 카빈을 쏘아대는 서기종 일병의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는 용기에 사기가 치솟아 육박전을 무릅쓰고 진지를 사수해냈다. 서기종 일병은 다시 이어진 중공군 공세에서 자동화기사수가 쓰러지자 자동화기를 이어받아 끝까지 사격하다가 중상을 입고 후송됐고, 한국군으로서 드물게 + 사병으로서는 극히 이례적으로 미 은성 무공 훈장을 받는다. 참고로 정훈병은 편제보직이 아니라 3대대장 김두일 대위가 지휘관의 의지 전달을 위해 각 중대별로 배치한 임시 보직이었다. * 당시 쫓겨가던 중공군이 얼마나 당황했는지, [[노무자]]에게 항복하거나 [[마을]] [[노인]]에게까지 잡혀올 정도였다고 한다.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 등에 의하면 전투 중에는 이것이 인간인가 싶을 정도로 강인하고 끈질기게 싸우는 최정예 전투원이면서도, 일단 총을 놓고 나면 누구보다도 온순해지는 것이 중공군이었다고 한다. 중공군이나 [[일본군]]에 의하면 이런 에피소드도 그렇게까지 신기한 일은 아니다.[* 정반대의 사례로는 [[신미양요]]때 반골심이 강한 조선군들이 포로로 잡혀도 미군에게 끝까지 저항한 적이 있었다.] * 중공군에 비해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국군 측에서도 전사 107명, 부상 494명, 실종 33명의 피해를 입었다. 대표적인 전사자가 [[이정민(KBS)|KBS 이정민 아나운서]]의 친할아버지. 이 쪽은 상술한 지암리 포위전 도중 저항하던 중공군에 의해 전사했다. * 인근 주민들은 시체들로 인해[* 여기엔 호숫가에서 사살되거나 익사한 것 외에 악취나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수장시킨 것도 있다.] 식수원이 오염되자 외부에서 급수를 해야 했다고 한다. 게다가 그 뒤로도 파로호의 [[물고기]]를 사람 시체를 뜯어먹고 자란 물고기라는 이유로 정전 후 10년 가까이 먹지 않았다고 한다. * 국군 6사단은 바로 직전에 있었던 [[사창리 전투]]에서 참패를 당했기에, 부대 외부 사람들로부터 '겁쟁이 블루스타(Coward Blue Stars)'라는 조롱성 별명을 받았다. 하지만, 6사단은 이 전투에서 주방어선보다 위로 올라 가더니 '''적의 3개 사단을 격파하고 추격해 전멸시킨 영웅'''이 되며, 이전의 전투에서 받은 치욕을 설욕하였기에 더이상 비웃음을 받는 일은 없어졌다. * [[중국]] 입장에선 치욕적인 대패 중 하나이기 때문에 호수 이름을 개명해달라고 한국 정부에 요청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http://news.kbs.co.kr/news/view.do?ncd=4207926&ref=A|#]] 이에 문재인 정부가 강원도와 화천군에 [[파로호]] 이름을 대붕호(大鵬湖)로 바꾸라는 지시를 했다는 내용도 있으나, 강원도와 화천군 관계자는 정부에게 [[가짜 뉴스|그런 지시를 받은 적이 없다]]고 밝힌 것을 보면 정부 측에서 무시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 측은 [[http://www.newswork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63559|'자국 관광객들이 불쾌하게 생각한다']]는 이유를 대고 있지만, 진짜 목적은 치욕적인 패전의 기록을 지우기 위함이다. 2020년 당시 [[최문순(1954)|최문순]] 화천군수 말에 따르면 대붕호라는 명칭도 역사적 근거가 빈약해 명칭 변경할 계획은 없다고 한다.[[http://www.kwnews.co.kr/nview.asp?aid=220122900053|#]] * 한개 연대로 9배 규모인 3개 사단을 박살내고, 사창리 전투에서 패전의 굴욕을 당한 것을 호되게 설욕하는 등 극적인 요소가 많은데다 2010년대 후반 들어 전쟁 영화들이 줄어듦에 따라 국내 밀덕들 중에는 매체에서 이 전투를 다뤄주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다만 전쟁 영화 자체가 돈이 많이 들고 [[백마고지 전투]]나 [[인천상륙작전]] 등에 비해 대중적인 인지도가 떨어지다보니 제작 가능성이 높진 않아보인다. * [[나무위키]]를 비롯한 한국어권의 많은 사이트에서 [[우마오당]]을 필두로 해당 항목 및 [[용문산 전투]]를 반달하거나 [[https://www.fmkorea.com/index.php?document_srl=2390538900|주한미군과 비교하며 주한중공군 주둔이 이득이라는 내용]] 등을 등재하는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44867346|반달리즘이 성행하고 있다]]. * 이곳에 수몰된 중공군 유해 발굴과 위령비 건립을 추진하자는 주장도 있다. 이는 침략군의 위령비를 건립해주자는 의견이기에 묵살되었으며, 인도적 차원에서의 유해 발굴만 이뤄지고 있다. 2021년 4월 15일 파로호 북쪽을 담당하는 국군 7사단이 취봉 유해발굴 개토식을 했다.[[https://www.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1069456|#]] * 전투 진행 도중 국군의 반격 과정에서 비극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상술한 중공군 20군이 수리봉에 알박기를 해서 국군의 반격을 지연시키는 사이 후퇴하는 중공군이 '''화천군 주민 대부분'''[* 정확한 수치는 불명이나 많게는 군 인구의 70%까지 추정하기도 한다.]'''을 [[납북|강제로 북으로 끌고가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리고 이렇게 북으로 끌려간 주민들은 [[실향민/북한|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